사진은 지난 3월 한국 천주교 순교자 3명의 유해가 발견된 왕우시에서 발견된 뼈다. (경주교구) |
교구에 따르면 유골은 1791년 신앙을 이유로 참수된 정윤지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유해와 1801년 4분의 1이 된 윤지현의 동생 프란치스코 윤지현의 유해로 확인됐다. 3명은 모두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유골 중에는 작은 그릇이 발견되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의 이름이 한자로 새겨져 있고 세례명, 사망연월일, 권씨 묘소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다.
윤지충 바울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인 사촌 정약용(1762~1836)에게서 천주교를 처음 배웠다. 윤씨는 천주교로 개종해 1787년 한국 천주교 최초로 개종한 베드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윤지충 폴은 어머니인 사촌 권씨와 동생인 프란시스 윤지헌 사이에 천주교를 전파했다.
윤지충 바오로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모친과 이모를 위해 천주교 장례를 거행하다 참수형을 당했다. 권씨는 40세의 나이에 가계의 원반을 태웠다는 이유로 참수형을 당했다. 두 사람은 죽기 전에 고문을 받았지만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김대전 성 안드레가 쓴 문헌에 따르면 풀윤지중과 건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였다.
천주교 순교자 3명의 유해가 발굴된 추나미신사 일대(경주교구) |
유골이 발굴된 추나미신사 일대 사업을 총괄한 경주교구의 프레데릭 김성봉 목사는 이번 발견이 우연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발굴조사 전문가들의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이다.
김씨는 목요일 코리아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그 말을 듣고 행복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혼란스러웠다. 순교자들이 그곳에 묻혔다는 기록은 없었다. 또한 그곳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전문가도 없었다. 유적을 찾고 있다면 마침내 찾았으니 다행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김씨는 2018년 현장을 방문했을 때 사당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고분과 나무 십자가만 있었다고 한다.
그는 “성당으로 알려졌지만 하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제대로 개발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곳의 상징적인 의미를 제대로 설명해주는 표지판이 없어서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고분은 상징적인 이유로만 존재했으며 아무도 그곳에 묻히지 않았다고 믿었다고 덧붙였습니다.
Kim은 사이트를 조사하면서 개발해야 할 더 많은 이유를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사이트가 국영 땅에서 왔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십자가가 서 있었지만 그것은 정경에 따라 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신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법적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주교구에서 땅을 살 방법을 찾았습니다.
국유지 매입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한국자산운용사는 토지를 임대하고 나중에 부지를 개발할 것을 권했다고 신부는 전했다.
김씨는 “국유토지를 사려면 무덤이 조상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먼저 고분에 속한 사람들의 살아 있는 후손을 찾기 위해 3개월 동안 현수막을 걸고, 그 다음에는 고분을 열어서 없는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이 표지판은 지난해 10월에 설치됐으며 3월 11일 유골이 발견됐다.
“경주교구장인 김순태 전 주교님은 제가 그 소식을 전했을 때 매우 기뻤습니다. 그러나 소식이 발표되기 전에 천천히 그들이 한국 최초의 순교자의 유해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세계로.”
당국은 지난 6개월 동안 현장에서 발견된 유골과 흔적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DNA 검사를 실시해야 했다. 김 연구원은 역사적 연구와 DNA 검사 결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9월 24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발표하고 카탈로그를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경주교구에서 유골이 발견된 땅을 매입하는 데에 매우 가깝다고 덧붙였다.
그는 “아직 진행 중이지만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말했다.
3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의식은 9월 16일 그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 근처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김 위원장은 “예식 후 추나미신사 안에 봉헌하고 순례자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필요한 시설을 마련하겠다”고 덧붙였다.
By 송승현 ([email protected])